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25:21

아마고 츠네히사

전국 3효웅
호조 소운 사이토 도산 아마고 츠네히사[1]
파일:403px-Amago_Tsunehisa.jpg

尼子経久 (あまごつねひさ) 니자경구
(1458년 12월 25일 ~ 1541년 11월 30일)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문화 속의 아마고 츠네히사

[clearfix]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

2. 생애

아마고 가는 쿄고쿠 가의 분파로, 시조이자 츠네히사의 증조부 타카히사는 쿄고쿠 타카노리의 동생이다. 타카히사의 아들 모치히사 대부터 대대로 본가의 이즈모 슈고직의 대리, 즉 이즈모 슈고다이를 지냈다 한다. 츠네히사는 어렸을 때 인질로서 주군이자 8촌 형인 쿄고쿠 마사츠네(京極政経)에게 보내져, 성인이 될 때에도 마사츠네의 '츠네'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츠네히사가 아직 20대일 무렵, 주가인 쿄고쿠씨가 누명을 씌워 퇴거를 명하자 결국 성을 잃고 무일푼으로 떠돌게 된다.[2] 혈기왕성하던 츠네히사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 십수명을 이끌고 풍물패에 섞여 이즈모 수호가 부재중인 틈을 타 성에 잠입하여 이즈모 갓산도다성을 탈환하였고, 이즈모 수호에 취임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일본 전국시대 하극상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갓산토다 성을 탈환한 이후, 주변의 혼란한 정세에 따라 츠네히사도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며, 1517년 다른 호족들을 복속시키고 이즈모국을 통일했으며 이후 호키국, 빈고국 등을 연이어 침공하며 주고쿠 지방 전체를 횡단해 최종적으로 주고쿠 11개국을 제패했다.[3] 하지만 주고쿠와 북큐슈에 걸친 전통의 강호, 오우치가와의 대립으로 더이상의 성장은 힘들게 되었다. 츠네히사가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오우치가 당주인 오우치 요시오키 교토에 있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벌이던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교토로 상경하며 본진을 비워두었기 때문이었기에,[4] 교토 상황을 정리하고 요시오키가 돌아오면서 빈고국 등 그동안 먹은 영토의 일부를 토해내야 했던 것. 아무튼 신흥세력으로써 괄목할만한 세력 확장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세력 확장중에 기대의 유망주였던 장남 마사히사가 유시에 맞아 죽었다. 츠네히사에게는 아들이 3명 있었는데, 차남인 쿠니히사는 전형적인 저돌맹진형의 맹장이었고, 삼남은 자꾸 영지나 요구하면서 징징거려서 갈등을 겪었다. 결국 이 삼남은 반란을 일으켜 츠네히사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했고 뒤에 자결했다.

장남인 마사히사에게 이미 아들이 있었으므로 손자인 아마고 하루히사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이 시기에 주고쿠에 있던 각 호족들은 오늘은 오우치가, 내일은 아마고가 하는식으로 여기붙었다 저기붙었다 하고 있었는데, 이미 50을 넘긴 아마고 츠네히사는 아키 국을 장악하기 위해 아키 고쿠진 잇키를 주도하며 아키 고쿠진의 대표격으로 떠오른 모리씨와 손을 잡고, 모리 모토나리를 손자인 하루히사와 의형제를 맺게 하는 등 자기사람으로 붙잡아 두려고 했다. 그리고 오우치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고 상경할 적에는 모리 모토나리를 함께 데리고 가기도 했다.

70이 넘어서 건강문제로 하루히사에게 가독을 상속하고 완전히 은퇴했다.

츠네히사가 골골하여 오늘내일하자 모리 모토나리는 대번에 오우치로 붙어버렸는데, 이에 분개한 하루히사가 모리 토벌을 준비하자 츠네히사의 동생으로 츠네히사의 오른팔격이었던 히사유키가 찾아와 의견을 물었다. 츠네히사는 '모리는 욱일승천하는 기세이니 일단은 수성하며 때를 기다리라'고 했지만, 혈기왕성한 하루히사는 대번에 출진하여 모토나리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 많은 아마고측 성주들이 오우치로 붙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 때 모토나리는 기세를 몰아 아마고군을 추격했지만, 구니히사등의 결사항전으로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츠네히사 본인의 대에 가문의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만년에는 이미 쇠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츠네히사가 죽은 후 집안에서 구니히사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결국 그 횡포를 견디지 못한 하루히사는 구니히사와 그 휘하 신구토(新宮黨)를 제거했다. 이것은 후세에 소설·기담에서 모리 모토나리의 모략에 의한 내부분열이자 아마고씨 멸망의 큰 원인으로 각색되었으나, 실제로는 신구토 멸망 시점까지도 아마고씨는 상당히 강성했으며 하루히사는 그다지 암군이 아니었다. 아마고씨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하루히사 사망 후이다.

츠네히사 대에 양자 결연이나 혼인 등으로 이루어진 인척관계가 이루어졌지만 배신을 하였기 때문에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히사 대에서 많은 가신을 숙청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마고 가문에게 숙청당한 이들이 모리 가문에 의지하게 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아마고 충성파와 숙청당한 구 가신들의 분쟁은 모리가 이즈모를 차지한 후에도 계속되어서 아마고 가문 멸망 후에는 다이묘로서의 아마고 가문을 재건하려는 세력과 모리에 붙은 세력들이 다투게 된다.

3. 기타

늑대처럼 교활하고 영악한 권모술수로 가문의 번영을 가져와 '이즈모의 늑대(出雲の狼)' 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생전에 주코쿠 11개국을 제패했기 때문에 '서국재상' 이라고도 불린다.

전투, 모략, 정치, 교양 등 다방면에 우수했으며 위의 초상화도 자기가 직접 그린 자화상이라고 한다.

게임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 등 매체의 영향으로 음험하고 무서운 노인의 이미지로 여겨지지만, 사실 영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사랑받는 영주였으며, 부하들에게 포상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자상한 일면도 있었다고 한다. 기반을 빼앗기고 쫓겨난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의 포상과 배려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부하와 백성들에겐 아낌없이 퍼주고 정작 본인은 한 겨울에도 삼베로 지은 옷 한벌만(여름용 옷) 입고 버텼을 정도. 다른 일화로는 어느 가신이 정원에 있던 나무 하나를 마음에 들어하자[5] 그자리에서 뿌리째 파내서 건네주었고, 그 가신은 매우 놀란 한편 감격하였다고 한다.

워낙 모략에 능하고 주군인 쿄고쿠 마사츠네의 가독을 이은 어린 손자의 후견을 자처했다가 그 아이가 흔적도 없이 행방불명돼서 이즈모를 그냥 먹어버리는 대단히 편리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냉혹한 이미지가 주류긴 하다. 하지만 호족들에게 영 무르게 대한 점이나 무재는 비범하나 방약무인한 구니히사를 방치하고 가신들에겐 못 베풀어서 안달인 것으로 보이는 일화등을 보면 모략가란 이미지답지않게 꽤나 무르고 선량한 사람으로도 보인다.[6] 문제는 자신의 생전에는 비범한 역량덕에 억누르고 있던 문제들이 하루히사 대에 일제히 터져 버린것.

그러나 이런 예로 츠네히사가 사실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인데, 이는 츠네히사나 하루히사 등의 능력이나 인덕 밖의 문제인 시대적 상황과 전국다이묘란 자리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원래 전국시대 다이묘는 게임이나 영지물에서처럼 한 지역의 통제권을 모두 움켜진 한 지역의 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대부분 그 지역 호족이나 유력 무사, 유력 농민 등 지역 유력자들의 연합맹주와 비슷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들과의 협력이나 지지 없이는 독단적인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요컨대 츠네히사의 저런 물러보이는 행동의 배경에는 전국다이묘라는 자리 자체가 원래 불안정한 자리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물론 그 반대로 이 인물을 사악한 인물로 보기도 힘들다. 센고쿠 시대는 친족끼리도 죽고 죽이는 배신이 난무하던 시대라 어느정도의 교활함이 없으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빼도박도 못하는 악행인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짓도 영지운영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7] 일본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성(姓)이 주어진 건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근대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질 수 있었던 건 다이묘나 중앙의 귀족 등 일부 특권계층 뿐이었으며 이들 입장에서 자기 영지의 이름없는 영민들은 식량/군역 셔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만큼 선악의 기준뿐 아니라 인권조차 현대와는 판이한 시대에 어찌됐든 영민들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단 것 자체가 어느정도 생각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즈모국에서 아마고씨의 인기는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의 1차 이즈모 상륙 때의 열렬한 호응으로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론 시카노스케의 전술적 미스로 갓산도다성 탈환에 실패하지만.

4. 대중문화 속의 아마고 츠네히사

4.1. NHK 대하드라마 모리 모토나리

일본의 작고한 원로배우 오가타 켄이 엄청난 열연을 펼쳤다. [8]

모리 모토나리의 라이벌이자 가장 큰 인생의 스승. 모리 영내에 기습하러 왔다가 꼬마인 모토나리와 마주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모토나리(쇼쥬마루)가 쏜 장난감 화살을 잡아내며 '강궁을 당길 수 있게 되거든 다시 만나자'라고 한다. 어른이 된 모토나리를 오우치씨와 함께 강력하게 압박하여 모리 가문이 강대세력인 아마고와 오우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든다. 잔혹무도하면서도 고단수의 계략을 구사하는 인물로, 모토나리가 휘하 병사, 가족 및 본인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보장해서 그것을 믿고 항복한 적의 장수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모토나리가 말리려 하자 스스로 칼을 빼들고 그 장수의 목에 검을 쑤셔넣어 죽이기까지 한다. 링크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한편으로는 모토나리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작중의 많은 명대사를 제공하는데, "난 마음씨 좋은 노인으로서 죽느니,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소원이다!"(わしは、良いジジイで死ぬぐらいなら、血飛沫の中で、地獄に落ちるのが本望だ)와 "명장이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악덕과 등을 맞대고 살아간다."(名将と呼ばれるものは、みな悪徳と背中合わせに生きておる) 등의 강렬한 대사들도 그렇고, 모토나리가 평생의 슬로건으로 삼게 되는 "꾀가 많은 자는 이기고 적은 자는 죽는다."도 츠네히사의 대사다.[9] 죽고 나서 할아버지의 존재에 열등감을 품고 역량이 떨어지는 손자 하루히사 때문에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4.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파일:尼子経久1.jpg 파일:尼子経久2.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아마고전국입지전.jpg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파일:GVAHatja4AMlWtV.jpg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호죠 소운과 더불어 모략 부분에서 톱클래스.[10] 다른 능력치도 모두 높아서 무력 빼면(무력은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세력 최강) 츠네히사가 가문 부동의 원탑이다. 근데 천상기에선 1534년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데 옆의 오우치 요시타카 모리 모토나리에게 허구헌 날 망하는 비참한 다이묘였다. 창천록 PK에서는 캐사기 캐릭터인 소운이나 라이벌인 오우치 요시오키 때문에 밀리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능력이 출중해서 플레이어 실력에 따라 병력 하나 안 쓰고 상대 성을 쓸어먹을 수 있다. 혁신에선 호죠 소운에 이어 지략 2위였으나 천도에선 소운이 대폭 너프되면서 지략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능력치 총합은 소운보다 낮다. 하지만 천도에서 들고나온 전법이 귀모 전작에비해 계략이 대폭 너프된 천도에서도 괴악하기로 이름높은 전법이다.

창조 PK에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가 대하드라마에서 오가타 켄이 연기한 아마고 츠네히사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하다.[11] 일러스트의 포즈와 옷은 오늘날 시마네현 갓산도다성 유적지에 있는 츠네히사 동상에서 그대로 따 왔다. 노부나가 탄생 시나리오에서 아마고 가문으로 시작하면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첫 장면부터 반란을 일으킨 삼남을 토벌하도록 한 손자 하루히사가 자기 숙부의 목을 들고오는 범상치 않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토나리 전국전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모토나리의 거대한 벽 같은 무서운 적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모략의 스승처럼 묘사된다. NHK의 모토나리 드라마에 묘사된 관계를 따 온 듯하다.

4.3. 이야기거리

센고쿠히메 2에 여자로 등장. 하루히사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은거 중 복귀. 어찌된 게 손자인 하루히사보다 더 어리게 나왔다. 오다 노부나가가 어린애라고 불렀다가 죽을 뻔 했다. 도대체 설정나이가 몇살이지?

전국컬렉션에서는 23화에서 유치원생으로 등장. 등장인물 중 나이는 두번째로 많으면서 제일 어리게 나오는게 함정.


[1] 경우에 따라서는 아마고 츠네히사 대신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들어가기도 한다. [2] 이때 겪은 고생을 통해 고단한 민초의 삶을 알게되었고 이 후, 그의 관대한 민생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 다만 주코쿠 11개국을 모두 지배한 건 아니고 실제로 지배한 건 3~4개국 정도다. 영향력을 미친 것이 11개국 정도라는 것. 물론 3~4개국 만으로도 거대 다이묘이긴 하다. [4] 결국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쫓아내고, 오우치와 손을 잡았던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복위시켰다. 그리고 한동안 교토 중앙 정계에 오우치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5] 츠네히사가 자신의 소유물이 칭찬받으면 못 베풀어 안달인 기행에 골머리를 앓던 가신들이 함부로 칭찬하지 않기로 밀약을 했는데 방심한 가신 하나가 설마 저 소나무를 주진 않겠지 하고 방심해서 아첨한 결과라고 한다. [6] 다만 그것은 츠네히사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근거로 삼은 산인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농토와 인구가 부족하고 낙후된 지방이었다. 세력이 훨씬 큰 오우치라든지 오우치 멸망 이후 모리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단합력 유지가 필수적이었다. 더군다나 아마고 가문은 어쨌거나 가신 신분에서 반역으로 주가를 몰아내고 다이묘가 된 경우였으므로 더더욱 전통적인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하들이든 호족들이든 누구든지 주군의 복수를 내걸고 반역을 저지를 위험이 상존했던 것이다. [7] 비사문천을 신봉해 아주 정의롭다는 우에스기 겐신도 인신매매와 약탈을 자행했었다. 수탈이 그냥 기본적인 자금조달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우리가 돼지 저금통에 들어있는 돈을 꺼내기 위해 저금통의 배를 가를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백성들을 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다이묘는 사실상 없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100퍼센트는 없으니 개중에 백성들을 털지 않은 다이묘가 있을 순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이묘들 중에선 없다. 돈통에서 돈을 꺼내지도 못하는 물러터진 다이묘가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기는 불가능했을테니까. [8] 1965년의 대하드라마에서 주연인 히데요시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며, 가장 최근작인 2007년의 '풍림화산'에서는 우에스기 겐신의 전설적 명군사 우사미 사다미츠로 출연했다. 2008년 타계. [9] 실제로는 모토나리가 큰아들 타카모토에게 보낸 서찰에서 나온 말로, 확인된 모토나리의 실제 어록 중 하나이다. [10] 천상기한정으로 지력이 182로 삼국지 시리즈의 초기작 유엽처럼 애매모호한 모사였다. [11] 원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몇몇 무장의 일러스트는 NHK 대하드라마에서 히트한 배우를 본떠서 일러스트가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다른 예시가 다테 마사무네.